화가 주정이의 부산 미술이야기 <2> 미술비평가 김강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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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1 299
 
타협 몰랐던 지역화단 '파수꾼'
1960 · 70년대 평문 300편 남겨
차가운 논리 공격적 필치 일관
국제신보 등 영남신문 독무대


시인 임명수가 운영하던 목마화랑다실에는 후덕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마담이 있었다. 나중에 목마가 동광동으로 옮겨간 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명문화랑다실을 운영하게 된다. 그간 널리 알려진 탓인지 명문화랑다실에는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끓이질 않고, 전람회도 쉼없이 열렸다.

1974년 가을, 모닝커피 타임이 지나고 손님의 발길이 뜸한 시간이었다. 다실 안 광복동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남자손님 한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40대 초반 쯤 돼 보이고 지적인 외모에 깡마른 체구로 얼굴에는 어쩐지 병색이 비쳤다. 마담이 다가가 탁자 위에 찻잔을 놓는데 찻잔이 달랐다. 다방에서 사용하는 찻잔이 아니라 달인 한약 사발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여인의 얼굴로 향했다. 별다른 표정없이 그저 시선 한번 주는 것이 그 남자의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그는 작고하기 서너달 전의 미술비평가 김강석이었다.

부산미술사의 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을 들여다 보면 각 신문의 미술비평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미술비평가 김강석(金綱石·사진)을 만나게 된다. 그의 고향은 경북 의성이지만 본적만 그렇고 1932년 일본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해방 후 영남대에서 수학한 후 철학과 문학을 섭렵하면서 대구지역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 50년대 말 부산에 기착하면서 문학평론에서 미술비평으로 넘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평문 중에는 지연 학연을 비롯한 인간적인 연으로 다분히 미온적이고 의례적인 수사로 두루뭉실한 게 적지않다. 혹은 지극히 난해한 문장으로 그 어떤 난처함을 비켜가고 또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굴절부위를 위장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김강석의 평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타협과 융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평문은 차가운 논리와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필치로 일관했다. 그는 그 때문에 물리적 폭력을 감내해야한 적조차 있었지만 그의 평필은 끝내 굴절을 몰랐다. 실제로 어떤 화가는 평문이 마음에 안든다고 김강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1959년 민주신보에 '창작의 시공간 문제'를 기고함으로써 시작된 김강석의 비평활동은 60년대를 거쳐 그가 지병인 결핵으로 숨진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 때까지 무려 300편이 넘는 평문을 남겼다. 그의 평문 대부분이 비록 신문 미술비평란의 단문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비평자가 15년 남짓한 기간에 써낸 평문으로는 많은 분량이 아닐수 없다. 더구나 당시의 열악한 매체사정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김강석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몇 푼의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미술비평이 직업이라면 직업이었다. 그의 평문들은 대부분 청탁을 받고 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전람회나 사안을 그 자신이 취사선택하여 쓴 원고를 신문에 기고하는 방식이었다. 쥐꼬리만한 원고료지만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에 다름없는 그로서는 청탁이 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의 열정 또한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강석의 평문은 민주신보 국제신보 부산일보 대구일보 영남일보 마산일보를 비롯, 영남의 각 일간지를 망라하고 '월간 새시대' '홍대신문' 등에도 기고했지만 주로 민주신보와 국제신보에 집중되었다. 그가 쓰는 원고는 빠짐없이 신문에 실렸고 그 반향 또한 대단했다. 어떻든 그가 쓴 수많은 평문이 쓰면 쓰는대로 모두 신문에 실릴수 있었던 것은 오랜기간 그와 의기투합한 한 사람의 문화부 기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흡이 맞는 필자와 기자의 관계에 의한 흔치않은 결과라고 하겠다. 1987년3월 갤러리 누보의 개관기념 책자의 부록으로 발간한 '김강석 미술평론집' 에 실린 시인 김규태 선생의 발문을 보면 그점이 입증된다.

'그는 내가 재직하고 있던 민주신보, 국제신보에 전람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미술평을 들고 왔다. 젊고 논리정연한 미술평론가를 갈망하고 있던 터에 그의 평필은 적어도 나에겐 직분상 꽤나 큰 소득으로 여겨졌다. 그가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나와 의기투합했던 것은 그의 평필이 반드시 정확하고 높은 안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글은 직접적이고 매우 건조했다. 지금에 와서 그에게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부산화단의 60년대와 70년대 중반은 김강석이란 이름의 외로운 한 파수꾼에 의해 파장지워진 사실을 기억해 둘 만하다.'


국제신문 2005.7.11일자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