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명의 눈동자] 中 나의 수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장편대하소설「여명의 눈동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소개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작품 가운데서 가장 역점을 두었고, 그래서 인 상적이라고 할 만한 곳을 한군데 소개하는 것으로 작품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여주인공 윤여옥은 통한의 한국 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겪은 여인이다. 그녀는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희생되고 마는데, 그녀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어린 여학생의 몸으로 정신대에 끌려가 일본군 종군위안 부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전선에서 조선인 학도병인 최대치를 만난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들은 종전 후 다시 만나 결혼하 게 된다. 대치는 일본군을 탈출, 중공군 팔로군이 되어 항일전에서 활약하는 동안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는데, 해방 후에는 결국 북한군 창설에 참가 하고, 한국전이 발발하자 남침의 선봉대로 38선을 넘는다. 그러나 유엔군의 참 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벌인 다. 그 과정에서 여옥이 역시 남편을 따라 입산했다가 빨치산이 되고 만다. 나 중에 그녀는 스파이로 의심받아 처형되는데 그녀에게 총구를 겨눈 사람이 다 름 아닌 대치. 그는 동료들의 강요에 못이겨 할 수 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자 기 손으로 처형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비극적 운명의 순간을 어떻 게 포착하여 절박하게 그려내는가 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아쉬운 대로나마 다음과 같이 그려냈는데 과연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간 궁금하지가 않다. - 작가의 말 …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여옥은 연민에 가득 찬 깊고 조용한 눈 길로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대치의 외눈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나타 나 있었다. 그는 연민에 찬 여옥의 눈길에 어쩔 줄 모르며 떨고 있었다. 저 여자 는 왜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을까. 왜 증오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않 을까. 서로가 증오를 품고 있으면 쏘기가 쉬울 텐데. 짙은 안개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여옥을 놓칠까 봐 두려워하면 서 몇 걸음 다가갔다. 여옥은 바로 두어 걸음 앞에 서 있었다. 그 거리라면 눈 을 감고도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였다. 여옥아, 제발 고개를 돌려라. 단발에 편안하게 가게 해주마.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 그는 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이 굳어버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좀더 위로 올렸 다. 총구가 여옥의 가슴을 겨냥하는 높이에서 그는 손을 고정시켰다. 갑자가 눈물이 솟구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용서해 줘. 그는 이를 악물 고 마침내 여옥을 향해 운명의 일발을 쏘았다. 탕! 단발의 총성이 긴 여운을 끌면서 멀리 사라지는 것과 함께 대치는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힘없이 떨어뜨렸고, 그때까지 냉혹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홉 명의 짐승 같은 사나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르르 일어섰고, 반면 여옥은 가슴을 적시는 검붉은 피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조그만 두 손 을 가만히 벌려 가슴을 싸안으면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비틀거렸는데, 그때 갑 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뒷걸 음질치는 위로 소나기가 마치 성난 매질처럼 쏟아져내리며 그 무리들의 얼굴 과 몸뚱이를 후려갈기기 시작했으니 아아, 17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군 정신대 로 끌려간 이후 지금까지 통한의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여옥이 이제 그 비정한 역사의 희생자로서 이름 없이 쓰러지려 하고 있 음에 그 조그맣고 연약한 죽음이 마치 거인의 죽음처럼 보이는 것이고 아아, 그녀는 드디어 무릎을 꺾으며 스르르 앞으로 쓰러지면서 두 손을 앞으로 길게 뻗어 대치를 잡으려하나 그는 겁에 질려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여옥의 몸뚱이 가 쓸고 간 자리에는 검붉은 핏물만 질퍽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치를 붙잡고 마지막 한 마디,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단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어 기를 쓰고 앞으로 기어가던 여옥은 마침내 힘이 다해 두 손으로 젖 은 땅과 잡초를 헤집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얼굴을 대지 위에 비비면서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그러듯 자꾸만 그렇게 비비면서 그녀가 생전에 사랑하 던 사람들, 어머니와 아버지, 함께 일본군에 짓밟히던 위안부들,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선가 엄마를 찾고 있을 큰 아들 대운, 자신의 손으로 파묻은 둘째 웅 이, 그녀를 이 지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고 끝까지 돌봐준 장하림, 눈먼 간난 이, 앉아서만 지내는 승기,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 그녀가 아마라고 이름 지어준 바보아이, 하림의 형수 명혜, 명혜의 딸 다련, 아들 건, 하림의 딸 은 하,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무수한 얼굴들, 또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의 얼굴까지 가슴에 뜨겁게 품으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고, 아아, 그러 다가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고 눈이 자꾸만 감기기 시작하자 그녀는 괴롭고 답 답함에 몸을 뒤흔들면서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었는데, 거기에 모 든 얼굴들이 일순 사라지고 하나의 커다란 모습이 나타나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안으려 하기에 바라보니 장하림이 거기에 웃고 있어, 그녀는 그에게 지 은 죄 백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하림씨 용서 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해 요, 사랑해요, 하고 울부짖자 하림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주루룩 흘렸는데, 아아, 그리하여 윤여옥은 그의 품에 안겨 마침내 한 많은 생 의 막을 내렸으니, 놀랍게도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 넷이었다. … |